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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베클리 테페
괴베클리 테페의 거대 사원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렇지 않았다면 1000년이 넘도록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상당한 지역에 영향을 끼쳤던 이성지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괴베클리 테페를 통해 토기 사용 이전 신석기시대에 종교적인 요소가 갖는 의미가 막대했다는 것을 잘 확인할 수 있었다. 이곳의 유물과 유적으로 인해 그 이른 시기에 숭배 의식 및 종교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세계가 존재했음이 밝혀진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알려져 있던 모든 지식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발견이었다. 돌로 만든 원형 시설물들에서는 또한 동물 뼈 무더기가 발견되었다. 이 뼈들은 고기를 실컷 먹을 수 있었던 축제의 잔해로 추정된다. 네발로 초리나 차이외에 있었던 특별한 건물에서도 비슷한 숭배 의식 행위와 축제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는 특정 제의 및 종교적 관념이 광범위한 지역에 퍼져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괴베클리 테페에서 나온 다양한 그림에 대해서도 비슷한 추측이 가능하다. 이곳에서 나타난 그림의 소재는 그 지역의 다른 사원에서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소재들은 북메소포타미아의 산간지역을 하나로 연결해주는 제의적 언어, 즉 하나의 상징체계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이 문화권에 살았던 사람들은 이 상징체계가 전달하는 내용을 읽고 또 기억할 수 있었다. 네발로 초리와 괴베클리 테페에서 나온 T자 기둥도 다른 유적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곳이 샨르우르파 근처 토기 사용 이전 신석기시대 유적지다. 이런 모든 증거는 북메소포타미아 산간지역에서 서로 연결된 문화 공동체, 다시 말해 문화적·종교적 공동 언어가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참고로 이 지역은 농업 발상지로 인정받는 지역이기도 하다. 즉 괴베클리 테페는 '신석기시대 종합세트가 완성된 지역 중심에 있었다. 이때 이 종합 세트는 한 번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하나씩 하나씩 형성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부연해두겠다.
그런데 이 숭배 의식에서 축제는 실제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까? 위에서 설명했듯이 괴베클리 테페와 같은 숭배 사원의 축조를 가능케 했던 저 엄청난 비용만으로도 숭배 의식이 전체 사회에서 가졌던 의미가 매우 컸을 것이라 쉬이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수천 년 동안 발달한 토기 신석기시대에서는 농경 주거지들이 일반적으로 서로 인접해 있었다.
이 주거지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활발하고 지속적으로 정보를 교환했고, 촘촘한 소통 네트워크가 작동했다. 이 네트워크를 통해물자와 사람과 정보가 교환되었다. 따라서 신석기시대 마을은 큰 영역권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생활에 필요한 것을 구하기 위해 매일매일 멀리 나갈 필요가 없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토기 사용 이전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아직 수렵 채집 생활을 할 때는 사정이 크게 달랐다. 이때는 자연에서 필요한 것을 획득해 필요를 충족시키는 경제에서 동식물을 직접 길러 필요한 것을 생산해내는 경제로 단계적인 이행이 이루어졌던 시기다. 당시 사람들은 여전히 훨씬 넓은 활동 반경을 필요로 했고, 따라서 마을은 50킬로미터 또는 그 이상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때문에 PPN B 시대 거주민들에게는 지속적이고 밀접한 상호 교류가 흔치 않았을 것이 확실하다. 또한 이때 그 지역 거주민들이 지속적으로 한 장소에 정착해 살았다고 보기도 어렵다.
하지만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공동체들에게도 주기적인 만남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이러한 교류 장소는 기본적으로 아직 수렵 채집 생활을 하던 집단들에게 정보와 물자 교환을 위한 교류의 장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비슷한 기능을 하는 장소들, 즉 계절이 바뀌는 시기에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소로 기능했던 곳들은 이미 구석기시대에도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만남의 장소는 또 신성한 곳이기도 했다.
요컨대 이 장소들은 수렵 채집 생활인의 사회적·경제적·제의적 필요와 욕구가 결집되는 곳이었다 할 수 있다. 괴베클리 테페는 의심할 바 없이 바로 그러한 장소 중 하나였다.
이와 같은 교류를 위한 만남은 커다란 축제와 비슷했다. 이런 잔치에서는 대개 제의적 의미를 지닌 음식을 함께 먹었다. 특별한 메뉴도 제공되었고 음식은 차고 넘치도록 풍족했다. 하지만 이처럼 커다란 잔치에서 특별한 식사를 하려면 필요한 시기에 충분한 음식이 공급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여기에서 인류 역사에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세계를 오늘날의 모습으로 바꾸어놓은 개혁, 즉 식물 재배와 동물의 가축화가 저 대형 축제와 연관이 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예를 들어 이런 잔치는 식물을 풍족하게 수확할 수 있겠다는 예상이 어느 정도 있어야 가능하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가축은 살아 있는 고기 통조림이 된다. 요컨대 수렵 채집 생활 시기에 시작된 이러한 축제는 규모가 계속 커져갔고 그 결과 식량 조달도 더욱 압박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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