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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아나톨리아의 대규모 초기 주거지
기원전 9000년대에서 기원전 6000년대 동안 메소포타미아 북부 및 서북부 변두리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은 인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사건들이 일으켰던 변화로 주변 지역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중앙아나톨리아는 바로 그러한 지역 중 하나로 가장 초기의 신석기시대가 발달했던 핵심 지역을 살짝 벗어난 곳에 있었다. 이 지역에서 차탈 회위크 유적지는 토기 사용 이전 시기에서 토기 사용 시기로 넘어가는 초기 신석기 이행기를 대표한다. 이 대규모 거주지 유적층은 총 14개로 나뉘며 기원전 7400년에서 기원전 6200년경 사이로 추정된다. 이곳은 강가의 넓은 선상지 위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이용할 수 있는 물이 풍부했다.
이는 강수량이 적고 건조한 코니아 고지대에서는 거주지로서 중요한 조건이었다. 이와 함께 이 주거지 주변에는 야생동물과 채집 가능한 열매가 많아 자연에서 구할 수 있는 식량이 풍부했다. 이러한 뛰어난 자연 조건은 먼 지역에 사는 주민들을 이 장소로 이주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든 결과 차탈회위크에는 커다란 주거지가 형성되었다.
코니아 고지대에서는 차탈회위크 외에 그 시대에 속하는 주거지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차탈회위크는 그 지역에서 유일한 주거지였고 교류할 수 있는 다른 주거지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정황은 여기서 나온 유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최초 발굴 시기에 나온 유적 중에서 가장 이목을 집중시켰던 것은 소위 밀집형 건축물이라 불리는 가옥 형태였다. 이 건물은 비슷한 형태를 오랫동안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희귀한 케이스였고, 그렇기 때문에 이 주거지 전체도 매우 특별한 성격을 띠었다. 주거지는 다닥다닥 붙은 사각형 집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롬 벽돌이나 다져서 굳힌 롬 흙을 사용해 지었다.
지붕은 납작한 모양이었다. 집집마다 천장 높이와 바닥 높이가 달라 공기가 잘 순환되고, 빛이 충분히 들어올 수 있었다. 각각의 집이 상이한 높이로 붙어 있어서 전체적으로 봤을 때 높이가 다른 계단이 서로서로 맞붙어 있는 모양이었다. 가옥들 사이에 있을 법한 큰길, 골목길 또는 집과 집 사이의 통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납작한 지붕 말고는 없었다. 다닥다닥 붙은 주택지 옆에는 공터가 늘 곁달려 있었다. 집들은 유적지층에 따라 400채에서 1800채까
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최근 발굴 조사 결과, 한 거주 구역에서 함께 살았던 인원을 최대 1만 명으로 잡았던 지금까지의 가설이 반박되고, 그보다 훨씬 더 적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한 주거지에 살았던 인구는 2500명을 넘지 않았다. 하지만 차탈회위크가 촌락 성격의 선사시대 주거지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 정도 인구가 조직적으로 함께 살았다는 사실도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밀집형 가옥은 쓰레기를 버리는 공터를 옆에 두고 살았고, 화장실에도 많은 문제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 물자를 집 안으로 옮길 때 각 집으로 들어가는 통로에도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촌락 형태의 집에 꼬이기 마련인 해로운 동물, 집쥐가 처음으로 발견되기도 했다.
집에 들어가려면 지붕을 통해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사다리가 필요했다. 사다리는 대부분 남쪽 벽에서 발견된다. 통상 이 벽 앞에 요리 시설을 설치해 출입구를 연기 빠지는 통로로도 이용했다. 그럼에도 연기와 그을음이 집 내부에 주는 폐해는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 저장물 보관을 위한 길쭉하고 좁은 공간 한두 개가 다른 영역과 분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생활의 대부분은 밖
에서 이루어졌던 것 같고 특히 지붕 위가 주요 활동 장소였던 것으로 보인다. 차탈회위크에서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은 유적은 숭배 의식을 위한 특수한 건물 또는 공동체의 공공 목적을 위해 유지했던 건물이다.
주거지 내에서는 여러 집이 하나의 단위를 형성해서 대부분 자급자족하는 살림을 운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모든 집에는 식량 저장소가 있었다. 롬 벽돌 제작, 동물 사육, 곡식 가공, 석기 또는 뼈로 만든 용구 제작 등의 일도 가정에서 개별적으로 이루어졌다. 거주민들은 채집과 수렵, 그리고 가축 사육과 농경생활을 통해 식량을 해결했다. 곡식으로는 외알밀, 에머밀, 겉껍질 없는 보리, 빵밀 등이 발견되었으며, 병아리 콩과 살갈퀴도 눈에 띄었다. 가축은 주로 양과 염소를 길렀다. 차탈회위
크 신석기시대 초기 지층에서 발견된 소뼈는 대부분 야생 소의 것이었다.
가축화된 소뼈는 기원전 5000년대에 해당되는 가장 위(따라서 가장 최근의) 지층에서만 발견된다. 주거지 건축물 발굴 목록에는 돌로 만든 용기와 더 후대에 사용되었던 토기가 포함되어 있다. 후자는 더 나중 시기에 속하는 퇴적층에서 발굴된 것이다. 토기가 발명된 것은 차탈회위크에서 조리법의 풍속이 바뀌게 된 데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사람들은 민무늬 토기에 음식을 조리했고 동물성 식량도 보관했다. 식물성 식량 보관을 위해서는 엮어 짠 바구니를 더 선호했다. 이와 함께 목재로 만든 그릇도 사용되었다. 그러한 증거 자료는 차탈회위크 유적지층 중 불에 탄 VI지층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지층은 보존 상태가 뛰어났다. 석기 중에는 규석으로 만든 것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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