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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 농사에서 원시 도시 중심지로, 황허강 유역

황허강은 중국 북부에 위치한 생활의 주동맥으로서 황허강을 따라 이미 일찍이 식물 경작과 가축 사육으로 식량을 조달하는 농경 공동체가 발달했다. 황허강의 수원은 티베트고원에 위치해 있다. 물줄기는 먼저 북쪽으로 향해 네이멍구 경계 지역까지 흘러가다가 여기서 오르도스고원을 끼고 커다란 곡선을 그리며 다시 남쪽으로 흐른다. 그러다 마침내 푸뉴산 북쪽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며 황해로 흘러들어간다.

 

황허강이란 이름은 이 강이 노란색이라 그렇게 지어진 것인데, 황색을 띠게 된 이유는 황허강이 작은 시내와 지류를 두루 지나가며 흐를 때 황토를 계속 휩쓸어 담으며 흘렀기 때문이다.

 

황허강은 아주 많은 황토를 나르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오늘날까지도 강가에서 농업이 발달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부식과 침식 작용으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일으키기도 한다. 황허강은 중국 북부 평원에서는 자연제방강Dammuferfluss 강이 실어 나르는 퇴적물이 양쪽 강변에 쌓이며 둑이 형성된 강, 이 둘 때문에 강의 수위가 주변 땅보다 높아질 수 있다이라고도 불린다. 황허강 일부 구간에서는 실어 나르는 퇴적물이 너무 많아 강바닥이 주변 땅보다 더 높아지는 경우가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매년 큰 홍수가 자주 발생하고 하천 바닥 지형이 자주 바뀐다. 잦은 홍수로 인한 재해는 반복해서 중국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마침내 하나라에 이르러 기원전 2200년경에 보호 제방을 설치한다. 오늘날 황허강 양 강변으로는 높이가 10미터쯤 되는 제방이 설치되어 있으며 강바닥은 주변 지형보다 약 5미터 더 높다. 이렇게 해서 황허강에서 더 이상 새로운 지류가 생겨나는 일은 없어졌다. 다른 한편 강력한 퇴적 작용은 강어귀 지역에서 해안선이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지역의 고고학적 유물로는 세석기가 주로 발견되며, 황허강 주변에 살던 이들이 플라이스토세 후기에 사냥, 채집, 어획을 했음을 보여준다. 이 유적에서는 홀로세가 시작되기 전 사람들이 수렵 채집 생활을 하고 있었음에도 오랜 기간 특정 장소에 정착해서 살았던 흔적이 드물게 나타난다. 이곳에서 출토된 갈돌은 기원전 1만 년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에 살던 사람들이 채집한 식물을 먹기 좋도록 가공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황허강 주변 지역에서는 인간이 기른 최초의 애완동물이 개였음을 증명하는 유적이 발견되는데, 시기는 플라이스토세 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난좡터우와 후터우량과  같은 유적지는 홀로세 초기 북중국에서 이미 최초의 토기가 생산되었음을 증명해준다. 이 토기들은 매우 단순한 그릇으로 표면은 민무늬로 매끄럽게 처리되어 있거나 얕은 새김 무늬로 장식되어 있었고 비교적 낮은 온도에서 구워 만든 것이었다.

 

제작 시기는 약 기원전 9000년에서 기원전 8000년 사이이다. 이는 북중국에서 식물이 재배되기 전에 이미 토기가 생산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존재했거나 부분적으로 심지어 이보다 더 앞섰던 토기 집단이 남쪽 양쯔강 지역과 동북쪽 러시아 극동 지역 또는 일 일본 열도에서도 발견된다. 북중국에서 토기 제작이 이 지역들과 무관하게
이루어졌던 것인지 아니면 영향을 받았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미제로 남아 있다.


요컨대 동아시아 문화권은 인간이 가장 일찍 토기 생산을 시작한 지역이다. 토기를 일찍 생산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사람들이 식물 식량을 조리하기 위해 불에 견디는 용기를 필요로 했음을 뜻한다. 유기 물질로 만들어진 용기는 식량의 보관을 위해서는 사용할 수 있었지만 조리 용기로는 부적합했다. 토기 제작은 비록 부분적일지라도 정착생활을 시작했다는 사실과 관계있다. 짐작건대 북중국 수렵 채집 생활자들은 늦어도 기원전 7000년대에 이미 식량 획득을 위한 식물의 다양한 가공 가능성을 실험했으며 심지어 식물을 경작하려고 시도했거나 최소한 현지에서 자연적으로 얻을 수 있는 야생식물이 익는 시기를 알아 이를 조직적으로 수확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결과 사람들은 생활 터전에 훨씬 더 의존하게 되었고 이동하는 생활은 줄어들었다.

 

이러한 원시적 정착생 활은 무덤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 무덤들에서는 간단한 부장품이 발견되었다. 신석기시대 생활 형태가 처음 나타난 기원전 9000년에서 기원전 7000년 사이는 홀로세 초기, 즉 기온이 낮고 건조한 기후에서 온난다습한 기후로 바뀌던 시기였다. 황허강 유역 여러 지역에서 나온 꽃가루는 플라이스토세 후기에 주를 이루었던 스텝 지대가 홀로세 초기에는 숲 지대에 잠식되어 많이 축소되었음을 보여준다.


기원전 7000년에서 기원전 5000년 사이는 신석기시대 초기로 불리며홀로세 기간의 이상적인 기후 조건과 시기상 일치한다. 강수량은 증가하였고 호수 수위도 상승했다. 황허강 하류에서는 상록수림이 계속 확장되었다. 이상적인 기후 속에서 황허강 주변 지역에서는 이미 네 개의 본격적 신석기 문화가 발달하고 있었다. 황허강 중심 지역 서쪽에 위치한 산시성의 라오타이 문화, 황허강 중류 남쪽 허난성의 페이리강 문화, 황허강 이북 허베이성의 츠산문화, 황허강이 황해로 유입하는
지역 바로 아래에 위치한 산둥성의 허우리 문화가 그것이다. 

 

이 시기에 경제와 사회는 근본적인 변화를 겪는다. 식물 경작, 암석으로 만든 도구 제작, 토기, 정주형 촌락 주거지 등은 이 문화 모두를 특징지었다. 특히 기장 농사는 중요한 의미를 지녔는데, 이미 기원전 6000년대 후반부터 경작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가축 로는 플라이스토세 후기부터 길렀던 것으로 증명된 개외에도 돼지가 있다. 돼지가 이때 처
음 가축화되었다는 것은 페이리강과 츠산 문화의 유적을 통해 알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은 식물 경작과 더불어 야생동물을 길들이려고 시도했었고 이는 주거지 주변에서 멧돼지를 쉽게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기장 경작이 증가한 것과 돼지 사육이 증가한 것 사이에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상관관계가 있다. 재배 식물은 가축의 사료로도 사용되기 때문이다. 최근 돼지 뼈에 대한 동위 원소 분석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재 모든 자료는 북중국에서 돼지는 토기 생산과 경작이 시작되고 거의 2000년이 지나서야 가축화되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페이리강 문화에서는 소와 닭이 사육된 흔적이 발견되기도 한다. 하지만 사냥과 야생식물 채집은 인간의 식량 조달에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많은 유적지에서 발견된 야생동물 뼈와 야생 풀의 씨앗 및 견과류로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