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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 지역의 하수나 문화

한 가설에 따르면 음 타바기야에서 오나가와 더불어 가도 기르려고 시도했을 것이라 한다. 즉 방은 짐승을 한 마리의 가두는 일종의 마구간 같은 곳이었다는 얘기다. 새끼를 깬 오나기가 그려진 채색 된 토기 파편들은 이런 추측을 뒷받침해준다. 왜냐하면 움 다바기야 주민들이 오나가 사냥꾼이기만 했다면 이런 모티브를 그리는 것은 거의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가장 유력해 보이는 것은 이 건물터가 대형 저장용 건물의 하단부이고, 그 위로 벽이 없었을 것이라는 가
설이다. 이는 눈길을 끄는 벽의 두께 때문에 설득력 있어 보인다. 방의 직경이 2미터보다 적은데도 벽은 50센티미터나 되기 때문이다. 이는 차이위와 같은 PPN B 유적지에서도 나왔던 비슷한 형태의 건물 하부를 상기 시킨다.


홈 디바기야와 같은 장소와 더불어 기원전 6000년대 중반 직후 일명 하수나 hassuna 문화가 들어선다. 이 문화는 북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하나 문화 초기의 토기는 움 다바기야에서 발견된 것과 상당한 연관성을 보인다. 손으로 거칠게 만들어 낮은 온도에서 구워진 용기가 주를 이루었다.

 

이와 함께 광택을 낸 표면과 새김무늬를 가한 더 섬세한 토기도 등장한다. 하수나 문화 부흥기에는 밝은 색 점토에 새김무늬와 채색을 한 목이 짧은 공 모양 용기가 일반적이었다. 이와 매우 비슷한 토기들이 많은 유적지에서 발견되었다. 장식 무늬는 주로 삼각형이나 마름모꼴이 사용되었고, 채색된 것에서는 격자무늬와 작은 얼굴 모양도 등장했다. 그 밖의 조형물은 점토로 만든 소형 여자 조각상 정도에 그쳤다.

 

하수나 문화


기원전 6000년대 후반 이 지역에서 인간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이해하고자 한다면 주거지를 다시 살펴봐야 한다. 하수나 문화 초기에는 원형 건물이 주를 이루었다. 직경은 3미터에서 5미터 사이였고, 더 큰건물은 얇은 분리 벽으로 내부 공간이 나뉘어 있었다. 유물로 추정해보건대 이 건물들은 소형 가족을 위한 가옥이었다. 그 옆에서는 정방형 공간들로 바닥 구획이 복잡하게 되어 있는 직사각형 건물이 발견되었다.

 

이 건물 내부의 복잡함은 움 다바기야를 연상케 한다. 이 건물이 어떤 기능을 했는지는 분명하게 해명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곡식 저장소 또는 곡물을 건조하기 위한 건물 기저부였을 것이라는 가설이 가장 그럴듯하게 여겨진다. 

 

어찌 되었든 이 건물은 주거 집단의 공동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던 것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이런 유의 건축물은 하수나 문화 후기에도 볼 수 있다. 이 시기에는 내부 공간이 여러 개인 정사각형 가옥이 증가하는 등 건축술이 전체적으로 더 발전된 인상을 준다. 이 건축물 대부분은 서로 딱 붙어 있어서 지붕을 통해서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지붕 위는 가옥 내부에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위한 작업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문지방과 돌로 만든 문 경첩이 발견되는 것으로 볼 때, 문은 지붕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건물 내부의 방과 방 사이에도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통상적으로 가옥에 설치되어 있던 시설로는 화덕, 점토로 만든 긴 의자, 지면보다 높게 만든 단상이 있다. 내부에서는 갈돌, 토기, 규석과 흑요석으로 만든 용구들, 바늘, 뼈로 만든 작은 도구들, 여러 암석과 광물로 만든 구슬들이 발견되었다. 흑요석은 자르모 유적지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온 것이었다. 흑요석으로 만든 도구들은 대부분 완성된 공작품의 형태로만 출토되었는데 이런 유의 석기 제작에서 필수 불가결하게 발생하는 쓰레기가 없는 점으로 미루어 원재료가 거래된 것이 아니라 제작이 완성된 도구 일습이 거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직물 제조

 

방추가 대량 발견된 것으로 볼 때 집에서 직물 제조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야림 테페에서는 납으로 만든 팔찌 등이 소량 출토되었지만, 이러한 자료만으로 하수나 시대 사람들이 야금술을 알았었다 말하기는 힘들다. 식량은 가축과 야생동물 고기가 기초였다. 돼지, 양, 염소, 소를 길렀고 주로 사냥한 동물은 가젤, 오나거, 멧돼지, 토끼 등이었다. 식물성 식량으로는 보리, 밀, 렌틸콩, 완두콩과 같은 곡물과 콩과 식물을 먹었다.


하수나 문화 거주지의 특이한 점은 어린이 해골이다. 이 유골은 통상 커다란 토기 안에 담긴 채 집 안의 바닥이나 문지방, 혹은 벽에 묻혀 있었다. 어른 유골이 묻힌 경우는 매우 소수였다. 따라서 어른들 대부분은 주거지 밖에 매장되었으리라 생각 된다. 부장품 등은 매우 부실해서 토기와 동물 뼈(즉 고기를 부장품으로 넣은 것임)에 국한되었다. 가끔 구슬들을
함께 넣는 경우도 있었다.
특별히 주목할 만한 유물로는 하수나 시대 야림 테페 주거지에서 나온 피리가 있다. 이 피리는 채색된 점토로 만들어졌다. 이는 서남아시아에서 나온 악기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간주된다. 그 밖에 피리가 발견되었던 예는 후기구석기시대의 것이 있으며, 지금까지 중부 유럽에서만 발견되었다. 

 

야림 테페에서는 소의 견갑골 발견되었다. 견갑골 위에는 새겨서 낸 자국들이 있었지만, 이를 예술 표현으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이 흔적은 산술 연산의 가장 오래된 증거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해석의 타당성 여부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수나 문화 시기 동안 행정 구조의 시초라 해도 좋을 새로운 변화들이 이루어졌다는 것만큼은 사실로 봐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 또 다른 증거물이 될 수 있는 것은 하수나 문화 초기 거주지인 텔 사비 압야드에서 나온 유적이다. 이곳에서 다량의 봉인 도장이 발견됐다. 이 도장은 점토나 뼈로 제작되었으며 그 밖의 재료를 이용하기도 했을 것이라는 흔적이 포착되기도 한다. 이 도장에는 다양한 기하학적 무늬와 동식물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사람들은 이 도장을 가지고 토기와 석기에다 점토로 된 봉인을 찍었다.

 

유기 재료로 만든 바구니나 포대에도 찍었겠지만 이것들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이 봉인은 사적 소유물에 의식적으로 가한 최초의 표식이다. 이때 개인 소유에 속하는 것은 식량이었고 봉인 도장을 찍음으로써 관계없는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다. 점토로 만든 이 봉인은 언제든 쉽게 개봉할 수 있었고 그런 점에서 진짜 효력이 있는 안전장치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는 서로 소유물을 혼동하지 않게 방지하기 위한 용도였거나, 잠재적 범죄를 방지하거나 명백한 규율 위반을 가시화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사실을 보면 당시 모든 가계 또는 살림 단위는 식량 생산이 공동체의 성과인가 아닌가에 상관없이 식량 중 특정한 몫을 소유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유재산을 표시하는 곳에서는 법에 대한 관념이 존재하게 된다. 

 

근동 지역에서는 인간의 정착생활과 식량 생산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유 관념과 법적 규율 또한 생겨난 것이다. 봉인 도장은 그러한 규율의 물질적 실현이다. 


요컨대 메소포타미아 북부 사회는 기원전 6000년대에 상당한 사회 분화에 도달해 있었다. 상상력을 좀더 발휘한다면 봉인 도장은 사유재산을 표시하기 위해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어쩌면 이 도장은 사람들을 개인으로 식별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어떤 도장에는 구멍이 뚫려 있는데, 이는 소유자가 도장을 몸에 걸고 다녔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이런 생각이 모두 가설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