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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되고 싶다면 달려라

인포언급 2023. 3. 31. 10:50

왕이 되고 싶다면 달려라

생물학자인 데니스 브램블Dennis Bramble과 인류학자인 대니얼 리버만 Daniel Lieberman은 200만 년 전에 인간의 조상들이 아프리카의 사바나 지역에서 짐승을 사냥하며 먼 거리를 달려야 했기 때문에 비로소 원숭이나 다를 바 없던 신세에서 벗어나 오늘날의 인류로 발달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기후가 바뀌고 넓은 삼림지대가 사바나로 변하면서 새로운 환경이 만들어졌고, 이런 환경은 '달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종에게 중대한 이점을 제공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은 오래 달릴 수 있는 신체 구조를 선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달리기라는 기술은 인류의 진화에 큰 몫을 한 셈이다. 우리 조상들이 신체 구조상 달리다가 땅바닥에 고꾸라질 수밖에 없자 신체 구조가 변하게 된것이고, 그러니 해부학적으로 말하자면 달리기가 곧 현 인류의 조상을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

 

브램블과 리버만은 달리기를 그저 두 다리를 이용해 걷는 행동과 연장 선상에 있는 신체 운동으로만 보는 기존 이론들에 동의하지 않았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450만 년 전에 '걷기 행동' 을 취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나무에 매달려 이 나무 저 나무로 돌아다녔다. 호모 좋은 땅위를 걸어 다니긴 했지만, 호모 사피엔스 종이 등장하려면 적어도 300만
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런닝
런닝

그 기간 동안의 우리 선조들은 오늘날의 인간과 닮은 구석이 거의 없었고, 따라서 걷는 능력이 인류 진화에서 가장 결정적인 변화의 요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인간과 비교했을 때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짧은 다리와 긴 팔 그리고 원숭이를 닮은 근육질의 몸통을 갖고 있었다. 브램블과 리버만은 이렇게 주장한다. "만약 자연선택이 달리기를
선호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여전히 원숭이 같은 외모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인간 신체의 스물여섯 가지 특징을 연구했다. 그들은 또한 4 만 년 전에서 180만 년 전 사이에 생존한 것으로 추정되는 호모 에렉투스, 즉 '직립원인' 의 화석들과 종종 최초의 인류라 칭해지곤 하는 호모 하빌리스, 즉 '도구를 쓰는 인간'의 250만 년 전 두개골 화석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다리와 발의 힘줄, 탄력 있는 관절과 능률적인 발가락이 인류를 달
리게 만들었다. 인간은 긴 보폭을 취했고, 몸통은 발로 땅을 밟을 때 발생하는 충격을 흡수했다. 인간은 균형을 잘 잡았고, 골격과 근육은 몸을 튼튼하게 만들었으며 몸이 과열되지 않고 달리기에 더욱 잘 적응할 수 있게 해주었다. 과열을 막는 데는 수백만 개의 땀샘도 큰 역할을 했다.

 

비록 인간의 발동작은 다른 동물들보다 느렸지만, 땀을 흘리면서 열을 견뎌내는 인간의 능력은 사냥할 때 자신보다 더 빠른 짐승들을 먼저 지치게 만들었다. 인간은 훈련을 받으면 극한의 지구력을 성취할 수 있고, 그덕분에 무더운 기후에서도 영양처럼 자기보다 훨씬 더 빠른 짐승들을 사냥할 수 있다. 

 

아직도 아프리카의 부시맨들은 영양이 체열을 식히지 못해 허덕이다 지칠 때까지 계속 쫓아다니는 사냥 방법을 쓴다.
이처럼 달리기는 원시 인류의 특징으로서 수많은 용도로 활용되었다.

 

왕실의 장거리 달리기

기원전 2091-2017년까지 수메르의 남쪽 도시들을 통치한 사람은 술기 왕이었다. 그는 전능한 사제이자 왕이었고, 장군이자 세금 징수인이었다. 왕은 백성들에게 옥수수나 여타 생산품들을 신전으로 운반하도록 명했고, 신전이 원래 수행했던 일종의 은행 역할뿐 아니라 급료를 지급하는 일도 함께 말도록 했다.


기원전 20868년에 성스러운 도시들인 니푸르 우르에서 추수감사절 축제가 열렸다. 습기 왕은 그날 해질 녘부터 다음 날 해지기 전까지 단 하루 동안 두 곳의 축제에 모두 참석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하려면 그는 니푸르에서 우르까지 달려갔다가 다시 돌아와야 했는데, 그 거리는 총 320 킬로미터에 달했다. 그는 다른 어떤 누구도 감히 입을 수 없는 신성한 의상을 몸에 걸치고, 값비싼 재료로 만든 모자와 상의를 갖춰 입은 후 턱에는 가짜 수염을 달았다. 대부분의 수메르 사람들처럼 그 역시 키가 작았으며, 활모양으로 휜 큰 코와 검은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몇 시간 후, 그는 우르에 도착했다. 그곳은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신성한 도시들 중 한 곳으로, 달의 신 난나가 살고 있었다. 그는 도시의 성벽 바로 밑으로 흐르는 유프라테스 강에서 물을 끌어 댄 관개 농지와 과수원을 지나갔다. 저 멀리 지구라트 신전이 솟아 있었는데, 계단식 피라미드 모양의 그 신전이 바로 달의 신이 거주하는 보금자리이자 슐기 왕이 도착
해야 할 최종 목적지였다. 슬기 왕은 성분으로 들어가 구운 진흙 벽돌을 두껍게 쌓아 올린 성벽을 통과한 후 비좁은 길을 따라 계속 달렸고, 작은 가옥들을 지나쳐서 온갖 성스러운 사원들이 있는 도시의 북쪽을 향해 나아갔다. 

 

그는 거대한 담장과 정원으로 둘러싸인 지구라트 신전의 탑을 향해 달려갔고, 그런 다음 수많은 계단을 뛰어올라 신에게 바치는 음식과 음료가 담긴 단지, 사발, 주전자들로 가득한 신전 내부로 들어갔다.


기 왕은 신에게 경의를 표하고 신을 달래기 위해 난나의 형상 앞에 음식을 비롯한 여러 가지 것들을 엄숙하게 공물로 바쳤다. 왕은 단지신의 대리자일 뿐이며, 모든 권력을 쥐고 우르를 특별히 수호해주는 존재는 바로 난나였다.


그렇게 제례의식을 치른 후 슐기 왕은 다시 니푸르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장녀가 여사제장을 맡고 있는, 우르에서 가장 오래된 신전을 지나치며 그 작은 도시를 떠났다.


수메르 사람들이 사는 지역은 대부분 평지라서 길 사정이 좋았다. 산이나 골짜기도 없고 평야를 가로지르는 강도 없는데다가, 그는 지금 선선한 계절 가을에 달리고 있었다. 슐기 왕은 안정적이고 편안한 보폭을 꾸준히 유지하되, 멈춰서 너무 오랫동안 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는 물을 마셨고, 길을 따라 도보 2시간 거리마다 설치되어 있는 오
두막에서 대추야자, 포도, 빵, 꿀 등을 먹었다. 하인들이 음식과 물 항아리 그리고 밤길을 밝혀줄 횃불을 들고 그와 동행했다. 왕은 어둠 속에서 혼자가 아니었으며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다. 그것은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 아래서 움직이는 진기한 소규모 행렬이었다. 왕은 선두에 서서 달리다가 걷기를 반복했고, 사소한 낌새라도 보이면 곧바로 왕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는 하인들이 그 뒤를 따랐다.


기 왕은 니푸르 외곽의 넓은 평야와 신전들을 지나 약속한 시간이 되기 전에 도시 성문으로 들어갔으며, 곧바로 태양의 신 우투와 다산의 여신이 난나를 찬양하기 위한 축제 장소로 갔다. 백성들을 대신해서 그는 형상 앞에 제물을 바쳤다. 왕은 자신의 의무를 완수했고, 자신이 말로 정한 규칙을 준수하며 대단한 육체적 공적을 세움으로써 사후의 명성을 보장받게 되었다. 왕은 서기들과 이야기꾼들의 도움을 받아 이 이야기를 더 재미있게 각색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몇몇 문서에는 지금의 이라크 지역에 해당하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지역인 남부 메소포타미아에 있던 이런 도시들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지역 사람들은 기원전 8000년 경부터 농경을 하기 시작했으며, 수확을 늘리기 위해 관개라는 진보적인 방법을 활용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이 엄청나게 밀집하게 되었고, 그 결과
기원전 3500년 이전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세계 최초의 도시들이 형성되었다. 인류가 알고 있는 가장 오래된 관료 제도가 시행된 이곳에서 전령들은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그들은 왕국 주변 여기저기에 공식 문서들을 전달했고 사람들의 크나큰 존경을 받았으며 올리브 기름이나 맥주, 토지 등을 보수로 받았다. 


젊은 신참들은 수도와 지방 총독들 사이에 오가는 편지들을 전달하는 일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나중에 그들은 노예 병참부대를 이끌었고, 식량이나 건축 자재의 운송 체계를 조직하는 일을 했다. 이르난나라는 파발꾼은 일을 너무 잘해서 궁정 관청의 수장이자 모든 전령들의 우두 머리가 되었고 나중에는 고위 행정 관료와 지방 총독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