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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 바클레이
그는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싫어하고 자신의 힘과 인내력을 시험하기 위해 세상 떠돌기를 좋아했던 원시적인 힘을 지닌 거인이었다. 로버트 바클레이 알라디스Robert Barclay Allardice(1779~1854년)는 영국에서 가장 활동적인 사람 가운데 하나였고, 빠르고 거칠고 힘세기가 마치 곰과 같았던 단거리 주자이자 장거리 주자였으며, 걷기 선수인 동시에 역도와 권투에까
지 재능을 지닌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1809년에 그는 1,000시간에 1,000마일(1609킬로미터)을 걷는 시합에 나서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그 시합은 지금껏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영국 역사상 가장 큰 스포츠 행사 중 하나였고, 당시 런던에서 북쪽으로 65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뉴마켓으로 수만 명의 관중을 끌어들였다.
바클레이는 일요일까지 포함해 앞으로 6주 동안 쉬지 않고 1시간에 1마일씩 걷겠다며 내기를 걸었다. 최초의 판돈은 제임스 웨더번 웹스터James Wedderbum-Webster를 상대로 건 1,000 기니였다. 그러나 판돈은 곧 엄청나게 커졌고 마침내 1만 6,000기니까지 올랐는데, 당시 이 금액은 농부가 320년 일해서 버는 돈과 맞먹는 액수였다.
거기에다 영국 황태자를 포함한 여러 갑부들이 자기들끼리 10만 파운드의 판돈을 걸었는데, 그 정도면 지금의 액수로 환산할 때 4,000만 파운드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이렇게 해서 육체적으로 명백히 불가능해 보이는 시합에 어마어마한 액수의 판돈까지 걸리게 되었다.
의사들은 이런 시합에 나섰다가는 피가 지나치게 과열되기 십상이고 그래서 죽거나 영구적인 불구자가 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초반에는 바클레이가 왕복으로 걷는 반 마일짜리 코스 주변에 구경꾼들이 얼마 없었다. 그러나 금세 소문이 퍼져 평소에는 대중적인 구경거리에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말쑥한 신사숙녀들까지 마차를 타고 이곳을 찾았다.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몰려들었다. 하녀건 노동자건 영주건 공작이건 할 것 없이, 모두들 가장 좋은 옷을 차려입고 사방에서 찾아왔다.
바클레이와 웨더번 웹스터의 응원자들, 시간 기록자들 그리고 보조 인력들이 코스의 양쪽 끝부분에 제각기 자리를 잡았고, 천막에서 자다가 이따금씩 나와서 함께 어울렸다. 1809년 7월 12일 수요일 오후 2시 30분을 몇 분 남겨놓은 시점에, 바클레이는 열광적인 응원자들로 가득 찬 선술집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몸무게가 줄었으며, 6주 동안 잠을 거의 자지
않고 엄청난 육체 활동을 한 탓에 초췌해 보였다. 그러나 그가 다리에서 붕대를 풀고, 가스등 조명을 받으며 평평한 잔디 코스 위로 곧 999번째 1마일을 걸을 채비를 할 때, 옷 바깥으로 그의 단단한 체구가 어렴풋이 형태를 드러냈다.
가스등은 그가 어둠 속을 걸을 때 더 나은 시야를 제공하기 위해 최신형으로 설치되었고, 그것 역시 더 많은 구경꾼을 끌어모은 요인이 되었다. 지금까지 가스등 몇 개가 박살이 났고, 어둠이 내린 후에는 권투 선수 빅 존 쿨리 Big John Cully가 무장을 하고 경호원으로서 바클레이와 함께 걸었다.
그는 자면서도 걸었고, 출발선에 서 있는 동안에도 잤으며, 무릎 이상과 치통을 겪고 있었다. 소나기가 쏟아져도 터벅터벅 걸었으며, 체열이 올라 땀을 줄줄 흘렸다. 그가 걸으면서 너무 심하게 절뚝거렸기 때문에, 기자들은 죽음과의 사투를 벌이면서 이제 곧 고꾸라질 것만 같은 사람에 관한 기사를 썼다.
그는 오일로 몸을 문지르고, 뜨겁게 데운 헝겊을 사용하라는 샌다이버 sandiver 박사의 충고를 따랐으며, 근거를 알 길 없는 동네 아낙네들의 속설들도 시험해보았다. 그러나 그의 완주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그는 1시간이 끝나갈 시점에 맞춰서 1마일 걷기를 마치고 짧은 휴식을 취한 후, 그다음 1시간이 시작될 시점에 다시 1마일 걷기를 시작했다. 초반에는
1마일을 걷는 데 평균 15분 정도 걸렸기 때문에 이 전략은 2마일을 걸을 때마다 최대 1시간 30분가량의 휴식 시간을 그에게 제공해주었다.
3시 37분에 바클레이는 그가 걷기로 한 1,000번째 1마일의 마지막 결승선을 통과했다. 환호가 터져 나왔고, 뉴마켓의 교회 종이 울렸으며, 기자들은 서둘러 속보를 썼다.
42일 만에 처음 청한 진짜 잠이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몸 상태가 좋았고, 28파운드 가벼워진 몸으로 축하와 갈채를 받으며 뉴마켓 거리를 활보했다. 로버트 바클레이 알라디스는 1779년에 스코틀랜드의 유리Ury 대저택에 서 700년을 이어 내려온 바클레이 가문의 일원으로 태어났다. 그는 시골에서 성장했고, 자신이 강인한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의 할아버지 '강자(强者) 로버트Robert the Strong' 는 수많은 유명 조상들 가운데 한 명일 뿐이었다. 그 가문의 저택에는 적들의 공격에 대비하여 마당에서 바로 들어오는 대문이 없었고, 방문객들은 로프를 타고 집안으로 들어 와야 했다.
늘 로프에 매달려서인지, 아니면 다른 젊은이들과 달리기 시합을 해서인지, 청년 바클레이는 놀라운 체격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1796년
에 그는 1시간 안에 6마일을 걸을 수 있다는 것에 100기니를 걸고 처음으로 내기 시합을 펼쳤으며, 그 이후로 줄곧 그런 시합을 즐겼다. 그는 돈을 땄고, 자신이 그런 내기를 통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바클레이의 아버지는 1797년에 죽었는데, 당시는 가문이 유난히 불운하던 때였다.
그는 많은 빚을 떠안았지만, 동시에 토지에 딸린 몇 가지 권리들과 더불어 1년에 400파운드의 수입을 보장받게 되었다. 유리의 여섯 번째 영주가 된 그는 가문의 재정을 바로잡아야 했다. 1801년에 바클레이가 '미친 영주' 라고 알려진 어느 귀족과 다섯 달 동안 네 번의 내기를 해서 가문의 1년 치 수입의 네 배나 되는 금액인 6,175파운드를 잃었을 때,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그는 돈을 벌충해야 했고, 달리기와 걷기는 그에게 최상의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그는 큰돈을 벌 궁리를 했고, 1801년 가을에 총액 1만 기니를 걸고 같은 사람에게 새로운 내기 시합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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