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장 농사에서 원시 도시 중심지로, 황허강 유역 황허강은 중국 북부에 위치한 생활의 주동맥으로서 황허강을 따라 이미 일찍이 식물 경작과 가축 사육으로 식량을 조달하는 농경 공동체가 발달했다. 황허강의 수원은 티베트고원에 위치해 있다. 물줄기는 먼저 북쪽으로 향해 네이멍구 경계 지역까지 흘러가다가 여기서 오르도스고원을 끼고 커다란 곡선을 그리며 다시 남쪽으로 흐른다. 그러다 마침내 푸뉴산 북쪽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며 황해로 흘러들어간다. 황허강이란 이름은 이 강이 노란색이라 그렇게 지어진 것인데, 황색을 띠게 된 이유는 황허강이 작은 시내와 지류를 두루 지나가며 흐를 때 황토를 계속 휩쓸어 담으며 흘렀기 때문이다. 황허강은 아주 많은 황토를 나르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오늘날까지도 강가에서 농업이 발달하는 ..
시베리아 스텝과 숲 지대에서의 사냥, 어로, 채집 아시아 북부는 여러 생태지역으로 구분된다. 아시아 북부에서 가장 남쪽, 아랄해와 비슷한 위도에는 사막 비슷한 지대가 위치해 있으며 그보다 북쪽으로는 먼저 스텝 지대가 나타나고 이어서 숲스텝 지대, 시베리아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타이가 기후대가 그다음에 나타난다. 그 위로 숲 툰드라가 이어지고 북극해 바로 남쪽의 툰드라 지대로 넘어간다. 이 남북으로 이어지는 기후대 스펙트럼은 거의 평행선을 그리며 연속적으로 시베리아 서쪽 절반에 걸쳐 서쪽에서 동쪽으로 펼쳐진다. 중부와 동부 시베리아에는 북쪽의 툰드라 경계지역에서 남쪽의 산악지대까지 타이가의 침엽수림이 펼쳐져 있다. 이 산악지대는 남쪽으로 인접한 몽골 및 중국 영토로부터 시베리아를 분리시킨다. 남부 산..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하수나 문화 한 가설에 따르면 음 타바기야에서 오나가와 더불어 가도 기르려고 시도했을 것이라 한다. 즉 방은 짐승을 한 마리의 가두는 일종의 마구간 같은 곳이었다는 얘기다. 새끼를 깬 오나기가 그려진 채색 된 토기 파편들은 이런 추측을 뒷받침해준다. 왜냐하면 움 다바기야 주민들이 오나가 사냥꾼이기만 했다면 이런 모티브를 그리는 것은 거의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가장 유력해 보이는 것은 이 건물터가 대형 저장용 건물의 하단부이고, 그 위로 벽이 없었을 것이라는 가 설이다. 이는 눈길을 끄는 벽의 두께 때문에 설득력 있어 보인다. 방의 직경이 2미터보다 적은데도 벽은 50센티미터나 되기 때문이다. 이는 차이위와 같은 PPN B 유적지에서도 나왔던 비슷한 형태의 건물 하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도시화 토기 사용 이전 신석기시대(PPN A와 PPN B)인 기원전 9000년대에서 기원전 6000년대 사이 일명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자연·경제·문화적 조건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경험을 겪게 된다. 정착생활과 식물 재배, 동물 사육이라는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 변화는 전체 인간 역사에서 가장 파급 효과가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다음 과 같은 질문이 필연적으로 따라 나온다. 이 시기에 일어났던 새로운 발견들 중 이후 수천 년 동안 근동 지역에서 이루어졌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것은 무엇인가? 토기 사용 이전 신석기시대가 끝나고 이어지는 시기의 주요 특징은 토기의 발명이다. 이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토기는 인간의 일상생활에서 떼어놓고 생각할 ..
신석기 초기 주거지 중앙 아나톨리아를 제외한 주요 흑요석 채집장은 필뤼산과 네네지산같이 차탈회위크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점토를 구워 만든 다양한 기하학적 무늬의 도장이 다량 발견되면서 이를 놓고 여러 의견이 제시되었다. 한가지 고려할 만한 견해는 사람들이 토기를 만들 줄 알게 되면서 개인 소유를 표시하기 위해 이 도장을 사용했다는 주장이다. 점토 도장은 어느 곳에서건 자립적 가정 경제가 확립될 때 등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옷감, 가죽, 나무 등을 장식하거나 피부에 찍어 몸을 장식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차탈회위크에서 나온 여성적 형태를 띤 소형 조각상은 일찍부터 유적 발굴자와 문화인류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 조각상을 놓고 당시 어머니 여신들이 숭배되는 모계..
중앙 아나톨리아의 대규모 초기 주거지 기원전 9000년대에서 기원전 6000년대 동안 메소포타미아 북부 및 서북부 변두리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은 인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사건들이 일으켰던 변화로 주변 지역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중앙아나톨리아는 바로 그러한 지역 중 하나로 가장 초기의 신석기시대가 발달했던 핵심 지역을 살짝 벗어난 곳에 있었다. 이 지역에서 차탈 회위크 유적지는 토기 사용 이전 시기에서 토기 사용 시기로 넘어가는 초기 신석기 이행기를 대표한다. 이 대규모 거주지 유적층은 총 14개로 나뉘며 기원전 7400년에서 기원전 6200년경 사이로 추정된다. 이곳은 강가의 넓은 선상지 위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이용할 수 있는 물이 풍부했다. 이는 강수량이 적고 건조한 코니아 고지대에서..
괴베클리 테페 괴베클리 테페의 거대 사원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렇지 않았다면 1000년이 넘도록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상당한 지역에 영향을 끼쳤던 이성지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괴베클리 테페를 통해 토기 사용 이전 신석기시대에 종교적인 요소가 갖는 의미가 막대했다는 것을 잘 확인할 수 있었다. 이곳의 유물과 유적으로 인해 그 이른 시기에 숭배 의식 및 종교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세계가 존재했음이 밝혀진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알려져 있던 모든 지식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발견이었다. 돌로 만든 원형 시설물들에서는 또한 동물 뼈 무더기가 발견되었다. 이 뼈들은 고기를 실컷 먹을 수 있었던 축제의 잔해로 추정된다. 네발로 초리나 차이외에 있었던 특별한 건물에서도 ..
새로운 시대의 추동력이 되었던 숭배 의식 축제와 제의 장소 근동에서 PPN 시기에 숭배 의식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흔적은 예리코 유적지가 발굴되면서 처음으로 대중에게 알려졌다. 하지만 이런 흔적은 몇몇 장소에 국한되지 않고 이 지역의 다른 많은 곳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특히 실제 해골 위에 반죽을 씌워 만든 조형물이 여기에 속한다. 일례로 이 유물은 요르단의 아인 가잘 지방에서도 발견되었는데, 이곳은 서남아시아에서 PPN 시기의 주거지 중 가장 면적이 넓은 유적지로 약 15 헥타르에 달해 예리코보다 몇 배 더 크다. 아인 가질과 예리코 두 유적지는 해골 모형 외에 또 다른 공통점을 갖고 있다. 석고로 만든 사람의 입상()과 두상 및 흉상이 그것이다. 예리코에서 출토된 상들은 모두 파손된 형태였던 데 반해 ..
베링 육교를 지나 신세계로 아메리카 대륙은 호모 사피엔스가 정착한 마지막 대륙이었다. 이주 시기를 놓고 여러 의견이 있지만 현재 연구 상태로 봤을 때 약 1만 5000년 전, 즉 북아메리카에서 위스콘신 빙하기로 불리는 마지막 빙하기 말엽으로 잡으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동북아시아에서 알래스카와 캐나다 서북부에 이르는 이주 경로를 따라 이동했는데, 이때 지나간 곳이 베링 육교다. 베링 육교는 동북시베리아와 알래스카를 잇는 육지 다리를 말하며(베링 육교설) 오늘날 베링해 북쪽 외곽에 위치했었다. 당시 상당량의 물이 극지방에서 빙하로 얼어붙었기 때문에 해수면은 약 125미터 하강해 있었고, 이 육교로 걸어서 건널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의 사하 공화국 레나강에서 캐나다의 매켄지, 그리고..
현생 인류 유럽을 변화시키다 계속해서 전 세계로 퍼져나갔던 호모 사피엔스가 현생인류로 취급되는 것은 다만 해부학적 이유에서만은 아니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밝혀진 호모 사피엔스의 모든 행동은 그가 문화적으로도 현생인류에 속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문화와 관련해서는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그 이전의 인간 형태, 특히 네안데르탈인과의 경계가 분명하게 그어지지는 않는다. 호모 사피엔스의 선배, 즉 네안데르탈인에 대해 알면 알수록 네안데르탈인은 행동 방식에서 후배들과 유사한 점이 많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네안데르탈인은 호모 사피엔스와 맞먹을 수는 없었다. 후기구석기시대는 세계 어느 지역보다 유럽에서 독보적인 연구 성과를 보이고 있다. 수많은 중요한 자료와 유적 덕분에 인류 발달과정과 당시 상황에 대해..